예레미야서 제 3장
예레미야서 3장 10-25절 :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배신한 자매 유다가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단지 거짓으로 돌아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11)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타락한 이스라엘은 배신한 유다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 하였느니라.
12) 가서 북쪽을 향해 이 말들을 선포하여 이르라. 주가 말하노라. 타락한 이스라엘아, 너는 돌아오라. 나는 긍휼이 많은 자니 그런즉 내 분노가 너희를 덮치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리라.
13) 오직 네 불법 곧 네가 주 네 하나님에게 범법을 행하고 네 길을 뿔뿔이 흩어 모든 푸른 나무 밑에 있는 타국인들에게로 가며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을 인정하라. 주가 말하노라.
14) 주가 말하노라. 오 타락한 자녀들아, 내가 너희와 결혼하였으니 돌아오라. 내가 너희를 취하되 도시에서 하나와 가족에서 둘을 취해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가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먹이리라.
16)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불어날 때에 곧 그 날들에 그들이 다시는, 주의 언약 궤라, 하지 아니하며 그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그것을 방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아니하리로다.
17) 그때에는 그들이 예루살렘을 주의 왕좌라 부를 것이요, 모든 민족들이 거기로 모이되 주의 이름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이고 다시는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걷지 아니하리라.
18) 그 날들에는 유다의 집이 이스라엘의 집과 함께 걷고 그들이 북쪽의 땅에서 함께 나와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준 땅에 이르리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너를 자녀들 가운데 두며 허다한 민족들의 아름다운 유산인 이 기쁨의 땅을 네게 주리요?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내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떠나지 말지니라, 하였노라.
20) 오 이스라엘의 집아, 마치 아내가 분명히 자기 남편을 배신하고 떠나는 것 같이 너희가 나를 배신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21) 이스라엘 자손이 슬피 울며 간구하는 소리가 높은 곳들에서 들렸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굽게 하며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로다.
22) 타락한 자녀들아, 너희는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타락한 것을 고쳐 주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로 오나니 주는 주 우리 하나님이시니이다.
23) 작은 산들과 수많은 산들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것은 진실로 헛된 일이니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주 우리 하나님께 있나이다.
24) 수치스런 일이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우리 조상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 즉 그들의 양 떼와 소 떼와 그들의 아들딸들을 삼켰나이다.
25) 우리가 우리의 수치 속에서 눕고 우리의 혼동이 우리를 덮나니 이는 우리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이라 하지 않고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비유했다.
하지만, 이 부부관계란,
물론 오늘의 구미제국, 특히 미국에 성행되는 것 같은,
일종 변태의 부부관계를 가리키는 것 아니다.
성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대등하다기 보다는, 주로 주종의 관계에 가까운 것으로서,
도리어 동양에 있어서의 것에 가까운 것이다.
말하자면, 창세기에 있어서와 같이,
사라가 남편이 아브라함을 내 주라고 부른 것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은 남편,
백성은 그 아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백성의 주시어야 할 이,
백성은 하나님의 수종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선민으로 삼으신 아내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언제나 가장 충실하게 위약 않는 남편이었다.
그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모든 대적(원수)에게서 지키시고,
모든 은혜를 베풀어 이것을 사랑하셨다.
그런데 이 신실한 남편에 대한 아내인 이스라엘이 취해온 태도는 어떠했을까?
그녀는 언제나 그 남편인 여호와께 배역하고,
이에 보답하는데 불신, 부실, 부정으로써 했다.
그녀는 몇 번인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참된 남편을 버리고, 우상과 간음을 행한 것이다.
하지만 은혜와 은혜로 부하신 여호와는 이를 버리시지 않고,
그 불의한 아내인 백성의 죄를 용서하사,
그녀를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써 맞이하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예언자에 의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만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네게로 돌아오려느냐’(3:1)고.
이는 실로 큰 사랑의 말씀이시다.
하지만 미련하고 미혹된 백성은,
이 은혜의 말씀에 청종치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참된 남편 여호와를 돌아보지 않고,
이방의 신신에게로 가서,
모든 높은 산으로 올라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간음을 행한 것이다.
그들은 결코 그 악한 행위를 회개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이에 있어서인가,
하나님은 부득이 그들에게 이연장을 보내어 이것을 내어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그들의 회개를 기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한번은 의 위해 불의한 아내를 내어보내신 하나님은
그가 제일의 아내로서 부르신 이스라엘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이반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심각해졌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을 최초의 사랑으로 돌아서게 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또 몇 번인가 예언자를 보내고,
그녀의 회개를 권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 불의한 아내에게 아무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다만 죄 있는 대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좋은 것이다.
그리하면 전의 모든 불의를 고쳐주시고,
죄는 모두 용서하여,
다시 최초의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점을 가장 절실하게 말한 것은,
예언자 호세아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와 귀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고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의 명하심 따라 음행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호세아 1장 참조).
그의 가정적 비극을 통하여,
그는 이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세아서 11:8)
예레미야도 역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애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권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내게로 돌아오라 대저 나는 너를 아내로 맞았음으로라’(3:14 일역)
8절 ‘이스라엘과, 그 패역한 자매인 유다’(3:8)
이에 대하여 일언함이 필요하다.
팔레스틴(1권 299역주)는 원래 지중해에 잇닿고 있는 아주 좁은 일지대로서,
남북으로 길이 약 40마일 동서는 평균 40마일 내외,
그 면적은 대체로 일본의 강핫슈에 후꾸시마껭을 더한 것과 같고,
혹은 영국의 웨일즈 정도 크기의 토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기서 발전하고,
드디어 다윗,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왕국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왕의 사후,
그 아들 르호보암의 치세 때, 북방제족의 이반에 의해,
마침내 왕국은 남북의 둘로 분열하고,
북방을 이스라엘, 남방을 유다라 부르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그 패역한 자매인 유다’라고 한 것은,
즉 이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은 먼저 북방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자를 보내어,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여호와에의 귀순을 명하셨다.
그런데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유다에 앞서기 약 150년,
마침내 앗수르(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다시 남방의 유다에 대하여 그 예언자를 보내어,
이들에게 회개를 권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울삼아,
유다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형벌은,
조금도 유다에 유익으로는 되지 못했다.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나님은 예언자에 의해 말씀하셨다(3:8-10).
그리하여 유다도 하나님께 복귀하지 않고서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의 비운을 보게 된 것이다.
현금세계에 있어서의 소위 유다인이란,
이 유다인의 후예인 것으로서,
먼저 멸망된 이스라엘인의 잔여는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역사상의 문제이다.
어떻든 이 유다인과 이스라엘인이 최후에,
하나로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은,
성서의 곳곳에 보여 있는 사상인 것으로서,
그 실현 여하는 미래의 역사에 관한 흥미 깊고 또 중요한 문제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 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3:12-13)
이것은 여호와께 반역한 죄를 거듭한 백성에 대한 은혜의 약속이다.
무조건의 죄의 용서이다.
다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죄대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랑의 말씀에 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내가, 서약을 어기고,
그 남편을 버림같이 여호와께 반역한 것이다.
이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백성의 반역을 생각하여,
혹은 울고, 혹은 분개하며, 그들의 회개를 바란 것이다.
21절 이하의 말씀은,
그가, 아직 회개하지 않은 백성이,
이미 회개한 것 같이하여, 그들에 대신하여 한 말이다.
'소리가 산위에서 들리도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회하며 기도하는 것이라'. 고.
22절의 전반은 하나님의 음성,
후반은 백성의 소리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과 사람의 소리가 합하여,
여호와께 기쁜 말로 되었던 것이다.
23절은 여호와에 대한 신뢰의 말,
24절은 백성이 자기의 과거의 죄와 수치를 인정 할 것을 예상한
예레미야의 말이다.
그가 하나님께 향한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절절한 회개의 말이다.
그렇듯 깊은 사랑으로써,
하나님은 백성의 회개,
여호와에의 귀순을 구하셨다.
하지만 그러하듯 하나님께 취한 예언자의 소리도
종내 그들을 그 이반, 불신에서 돌이키게 할 수가 없었다.
최후로,
하나님은 그 독자를 보내어 백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하셨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완미한 사람의 자녀들은,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으며,
구원되기 위해 참 빛으로 오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의 절대한 사랑도, 은혜도,
결국 배반한 유다인을 그 불신에서 돌아 서게 하는 기회로 되지 못하고,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을 비웃고,
박해하며 그리고 최후에 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
실로 인류의 역사에 이것 이상의 비통한 사실은 없었다.
하나님의 선민의 역사는,
일면 반역의 역사이다.
그들 이스라엘은 어찌하여 귀한 할 수 없었던가?
제1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보다도 가나안의 우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뿐 아니다.
제 2로,
그들은 먼저 자기를 거룩히 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만들어,
그런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대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전적으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의 유일한 길인 것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 있는 대로 대담하게 은혜의 보좌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최선의 길 복음의 길이다.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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