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또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을 속이고 진리를 말하지 아니하리라

거듭난 삶 2022. 10. 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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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제9장의 이해

 

예레미야서 91-26: 오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 내가 내 백성의 딸의 죽임 당한 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 오 내가 광야에서 여행자들이 묵을 곳을 얻어 내 백성을 버려두고 그들을 떠나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들이요, 배신한 자들의 모임이로다.

3)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활을 당기듯 자기 혀를 구부려 거짓을 말하되 땅에서 진리를 위해서는 용감하지 못하니 그들은 악에서 악으로 나아가며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각 자기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형제도 믿지 말라. 모든 형제가 철저히 빼앗아 대신 차지하고 모든 이웃이 비방하며 다닐 것이요,

5) 또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을 속이고 진리를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자기 혀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가르쳐왔으며 불법을 행하려고 자신을 지치게 하는도다.

6) 네 거처가 속이는 일 한가운데 있도다. 그들이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 알기를 거부하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7) 그러므로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의 딸로 인하여 어떻게 할까? 내가 그들을 녹이고 단련하리라.

8) 그들의 혀는 이미 쏜 화살 같고 또 거짓을 말하나니 사람이 입으로는 자기 이웃에게 평화로이 말하나 마음속으로는 숨어서 엿보는도다.

9) 내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혼이 이 같은 민족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하겠느냐? 주가 말하노라.

10) 내가 산들을 위하여 슬피 울고 통곡하며 광야의 거처를 위하여 애곡하리니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아무도 거기로 지나가지 못하고 가축 소리도 들을 수 없으며 하늘들의 날짐승과 짐승도 다 도망하여 사라졌도다.

11) 또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용들의 소굴로 만들고 유다의 도시들을 황폐하게 하여 거주민이 없게 하리라.

12) 이 일을 깨달을 지혜로운 자가 누구인가? 주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그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고 광야같이 불에 타서 아무도 지나가지 아니하는지 밝히 알릴 자가 누구인가?

13) 주가 말하노라. 그 까닭은 그들이 내가 그들 앞에 세운 내 법을 버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14) 오히려 자기들의 마음에서 상상한 것을 따라 걸으며 자기들의 조상들이 자기들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라 걸었기 때문이라.

15) 그러므로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주어 마시게 하며

16) 또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이교도들 가운데로 그들을 흩어 버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칼을 보내어 마침내 그들을 소멸시키리라.

17)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애곡하는 여인들을 불러 그들이 오게 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재주 있는 여인들을 불러 그들이 오게 하고

18) 그들이 서둘러 우리를 위해 통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의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노략을 당하였는가! 우리가 그 땅을 버렸고 우리의 처소가 우리를 버렸으므로 우리가 심히 당황하게 되었도다, 하는도다.

20) 오 여인들이여, 그러할지라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듣고 너희 귀로 그분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너희 딸들에게 통곡하는 것을 가르치며 각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21) 사망이 우리의 창문 안으로 넘어 들어오고 우리의 궁궐 안으로 들어와서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젊은이들을 끊어 버렸도다.

22) 말하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심지어 사람들의 사체가 배설물같이 빈 들판에 떨어지며 수확하는 자 뒤에 한 움큼씩 떨어지듯 떨어지되 아무도 그것들을 거두지 아니하리라.

23)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24) 오직 자랑하는 자는 이것 즉 자기가 깨달아 나를 아는 것과 또 내가 땅에서 인자함과 공의와 의를 집행하는 주라는 것을 자랑할지니라. 나는 이 일들을 기뻐하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25)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더불어 할례 받은 자들을 다 벌하리라.

26) 이들은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가장 먼 구석에 있어 광야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니라. 이 모든 민족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의 온 집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아아, 내 머리가 물이 되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 되면 좋으련만’(9:1- 일 개역)

 

이는 대예언자 예레미야의 비탄의 소리이다.

애국자의 통곡이다.

 

세계의 어디에 또 누가,

이렇듯 심각한 탄식으로써 자기 나라 위해 운 자가 있는가?

 

그것도 자기 불행을 탄식해서가 아니라,

자기 희망이 이룩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자기 사업이 실패하고, 자기 사랑이 배반당하여 탄식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국민의 죄 때문에,

그 멸망의 심려 때문에,

만사를 잊어버리고 비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직,

나라위해, 정의위해, 하나님 위해,

그러한 비탄을 발한 일이 없다.

 

우리들은 실연자의 고백과 번민을 읽고서 동정의 눈물에 젖는다.

가정 소설의 비극을 읽고서 운다.

 

하지만, 우리나라, 우리 목전의 이 멸망의 위험을 보고도

근심하거나 또 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

 

먼 옛날의 유다국의 일은 아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상태이다.

날마다의 신문지로써 보도되는 죄악과 비극을 보고,

우리들은 오히려 이에 흥미를 느끼며,

혹은 이야기의 제목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웃음거리, 공론 거리는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의 존망에 관계된 대문제이다.

 

일찍이 고 오꾸마시게노부후(261주 참조),

내 문장을 읽고, 냉평하여 말한 듯하다.

 

우찌무라라는 놈은 아마도 매일 밥에 눈물을 쳐서 먹을 수 있다면,

나의 명예는 이상 더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어찌하여 그렇듯 비탄을 발했을까?

 

백성의 불신, 백성의 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간음하는 자, 거역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활을 당기듯이 거짓을 쏘는 자,

정의와 진실위해 강하지 못하고 악에 강한 자,

자기의 이익위해 반대당을 칠 때에는, 실로 강렬을 다하는 자이지만도,

정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사회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아주 무력하다.

이는 모두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유다국 위해 탄식한 말의 가장 적절하고,

동시에 가장 슬퍼해야 할 실례를,

우리들은 오늘 우리나라에 있어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 백성의 절망적 상태에 견디다 못하여,

예레미야는 간절히 그들을 떠나서,

홀로 있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9:2 한글 역)라고.

 

이 말을 읽고서,

우리는 이것을 동양류의 둔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다만 현세의 죄를 싫어해서 홀로 속계를 피하여,

깊은 산속에 방장의 암자를 꾸미고,

광풍제월을 즐기려고 하는 소위 중을 말함이 아니다.

 

이는 전터에서 격전에 지치고, 부상한 용사가,

잠시의 휴게를 구함 같이,

백성의 악과 싸우고,

몸도 정신(심령)도 사아여 피로해진 하나님의 사람이,

잠시 세상과 헤어져(떠나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하렴의 간절한 소망이다.

 

세상을 떠남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은, 보다 큰 힘을 얻어,

하나님 위해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는 오래 하나님 슬하에서 쉴 수가 없다.

세상의 죄가 그에게 강요하고,

여호와의 음성이 그에게 임하는 때는,

그는 다시 나타나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4-9, 이것 역시 특이한 말이다.

과격하다면 참으로 과격한 말투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여하에 있다.

 

우리들은 오늘의 일본 상태에서 생각할 때, 이 예레미야의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나라의 농촌에 있어서는 이 말과 달라,

다소의 신용과 사람들 서로의 후의에 의해,

나날의 생활이 영위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을 도쿄에 의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결코 이웃에 대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열 수가 없다.

 

우리들은 누구를 신용하여 좋을지 고심한다.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이 된다.

그들은 이해에 의해서는,

손바닥을 뒤집듯 신의를 버리고서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특히 참된 형제여야 할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이 말이 사실임을 아는 것이다.

교회는 그 의미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곳이다.

교회의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모함하며,

서로를 헐뜯는 것의 심함이란,

그들 자신 가장 잘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아주 거짓과 불신의 공기 속에서 거짓을 호흡하며 생존하는 것이다.

타락은 여기까지 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은 과격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사회라든가 교회라든가의 타락과 부패가 고쳐질 것이라면,

이러한 말로써 고쳐지는 것이다.

 

그는 죄의 중심에 들어가,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죄를 죄라하지 않고서 죄에서 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늘날이라 해도, 조금도 변함없다.

만약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면, 그 악을 명백하게 책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지금의 일본에 그렇게 교회를 위해 교회를 책망하는 교사가 있는가?

일본을 책망하는 예언자가 있는가?

타락했다고는 해도, 유다에는 그러한 위인이 배출되었다.

유다가 다른 국민보다 우월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우리들도 하찮은 자 이지만도 이에 따라서

국민에게 참된 죄의 회개를 역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절 이하는, 모두 놀라운 말이다.

 

백성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형벌의 선고이다.

하나님의 형벌에 의해, 멸망되는 유다 또는 예루살렘의 참상이다.

또 그 멸망을 통곡하는 예언자의 비탄이다.

 

내가 산을 위해 울고 부르짖으며, (광야)의 목장을 위해 슬퍼하는 도다’(9:10 일역).

 

이러한 것은 모두 대예언자의 말로서,

하나하나 우리의 연구묵상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은,

전장의 요점을 보여주는 23절 이하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9:23 한글 역)

 

실로 위대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인은 무엇보다도 제일로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다.

철학이다. 문학이다. 과학이다.

특히 지식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의 존재를 모르는 일본에 있어서는,

지식은 최상의 자랑, 또는 권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명석한 두뇌이다.

예민한 재능이다.

학생은 언제나 그는 머리가 좋다는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머리가 좋은 것,

기타 것은 어떠해도 좋고,

다만 이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일,

또 선망의 중심이다.

 

물론 두뇌의 명석한 것, 지혜 있는 것,

그것 자신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크리스천이라 해도, 머리가 좋은 것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자랑함이 나쁘다는 것이다.

지혜 그것 중에 도리어 그 사람을 파괴하는 위험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힘(한글 역;용맹)이다.

제일로 완력이다. 병력이다. 권력이다.

 

영국의 해군은 어떤가, 일본의 육군은 어떤가,

불국(프랑스), 미국의 비행기는 어떤가고.

 

지금은 전 세계를 통하여 이 폭력을 자랑삼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다.

군비 있고서의 국위이다. 정의이다. 독립이다.

이것 없이 국방의 기초가 어디 있는가고.

 

셋째로 세인이 자랑하는 것은 돈이다.

 

돈 없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모든 생활 또 행복의 기초는 돈이다.

돈 없이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있으나 마나(유야무야)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미타(2209), 교회도, 돈으로 빛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상태를 알고서 예레미야의 말을 읽을 때,

그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를 알 수 있다.

 

시험 삼아 오늘 일본 사회에 있어서,

혹은 대학의 교문에서, 병영 앞에서,

대회사의 문전에 서서, 이 말을 했다면 어떨까?

 

물론, 그들은 커다란, 조소로써 이를 묻어 버리리라.

지식 없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힘 없이 무엇이 되겠는가?

 

특히 돈 없이 무엇이 될 것인가고,

교육가도 정치가도 종교가도,

도덕을 중히 여겨야 할 것, 정신을 존중히 여길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있어서는,

지식과 돈 없이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엇음을 모두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명백히 말한 것이다.

지식 자랑할 것 못된다고.

 

우리들 크리스천도 또한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입으로만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니다.

마음에 확신하며,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서는 데는 누구도,

나는 준재요, 나는 부자요, 나는 권자라는 배경을 가지고서,

그에게로 갈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는 철두철미,

() 제일, () 제일, () 제일의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는 자까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것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심외 그지없는 일이다.

 

지식도 힘도 부도 자랑할 것 못된다면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예레미야는 이에 대답하여 말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9:24 한글 역)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제일로, 명철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실로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

 

제 이로는,

하나님이 인애와 공도와 공의를 세상에 행하시는 분이시심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상에 행하심을 아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지혜와 힘과 부인지는,

인류의 역서에 있어서 충분하게 증명된 일이다.

 

인류가 달성한 최고의 학문,

또 세계를 근본적으로 개혁케 한 최대의 세력,

또는 인류에게 임한 최대의 복지는,

모두가 신앙의 은사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라 해도, 조금 마음을 평정히 하여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부라든가, 지식이라든가, 권력이 의뢰할 바 못되는 것임은 명백하다.

이것에 의해 바벨론도, 이집트(애굽), 로마도, 그리스도 멸망했던 것이다.

 

오늘의 일본에 있어서도,

지식에만 의존하여, 몸을 망친 몇 천의 준재,

부에 의뢰하여 아주 비참한 경우에 빠진 몇 만의 가족이 있음을 생각하면,

이것에 의뢰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분명해 지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명철(깨달음)이란, 즉 이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의의 실행자이시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

 

즉 여호와가 단지 은혜로 풍부하시고, 공도와 공의에 부하시다는 것만은 아니다.

여호와는 이것을 지상에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최대의 지혜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과연 땅에 인애와 공도와 공의를 행하시는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은 악인의 행위를 보고 말한다.

 

그들의 행위는 악하지만도, 그 마음에는 좋은 데가 많이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악행까지 변호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인이고,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인이다.

 

하나님은 다만 은혜로우시고, 의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그는 이를 행하시는 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 하나님은 이를 세상에 행하시는 분이시다.

세계사가 그 증명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세상의 모든 사건위에 행해져 왔다.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의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표면상의 일인 것으로서

보는 눈으로써 한다면,

불의가 무너지고 정의가 승리를 얻고 있음은,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 세계는 결국 사람과 정의의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 처하는데 이것을 안다는 것은, 가장 필요한 일이다.

우리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자신이 또한 그 실행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사상을 가질 때,

우리들의 세계관은 그 근저에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예레미야의 말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실로 혁명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

 

전절과 아울러 25, 26절도 특이한 말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외면의 의식은 아무 유익도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할례 있는 이스라엘인도, 할례 없는 이방인도,

한 가지로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처벌된다는 말이다.

 

할례는 원래

아라비아, 이집트(애굽) 지방에 거주하는 세미틱(셈족) 인종들 사이에

생리적 필요에서 일반으로 행해지던 것,

후에 이것이 종교적 의식으로 된 것이다.

 

또 그들 사이에는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이 통례였는데,

어떤 인종은 그 수염을 깎았다.

 

이스라엘인은 할례를 받았으나,

이방인(그리스인들)은 이것을 받지 않았다.

 

즉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할례 있는 이스라엘인도, 이것 없는 이방인도,

수염을 깎는 국민도, 깎지 않는 국민도,

그 모든 외면의 종교적 의식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정의로써 그들 모두를 벌하신다는 것이다.

 

, 만약 이것을 오늘의 말로 번역하여 말한다면,

물의 침례를 받은

영국인도,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또 일본교회의 신자도,

또 이것을 받지 않은 일본인도, 지나인도,

그 인종의 습관에 상관없이, 종교의 종파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께서 이것을 한 가지로 벌하신다는 것이다.

 

침례를 받고, 교회에 속한 대다수의 구미인이라고 해서

그 침례에 의해 구원되는 것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고

참된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은 까닭에,

불신자와 한 가지로 처벌 된다는 것이다.

 

이론보다 증거이다.

저 구주대전(2권 부록 세계대전 참조) 같은 것,

전적으로 이는 침례만 있고,

참된 회개 없는 국민이 받은 최대의 형벌임은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실이다.

 

마음의 변혁이 따르지 않는,

종교적 의식이 전적으로 효과 없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그의 주안은 다음 두 가지 점에 있다.

 

즉 외면의 지식, , 부는 자랑할 바 못된다.

동시에 종교적 의식도 역시 의뢰할 것이 못된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함의 자격을 주는 것 아니다.

 

의뢰할 것은, 영과 진리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인애와 공도와 공의를 행하는 자임을 알아,

우리들도 또한 이를 본받아 정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가서 6:8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

(19261, 3, 5, 6, 7성서지연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