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거듭난 삶 2023. 10. 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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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신자의 친목

 

사도행전 11-1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244-47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어떠한 책인가 하면

이것은 누가복음의 계속으로서

 

내가 이미 전의 글을 지어()의 글은 곧 누가복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전도를 시작하신 기사이고,

사도행전은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끝나는 사이에

세 계단이 있었다.

 

1은 예루살렘 시대인데, 베드로가 주되어 일하고,

 

2는 안디옥 시대로서, 스데반의 박해에서 시작하여 바나바와 바울이 주로 되어 일하고,

 

3은 최후가 로마 시대로서, 물론 바울이 주이다.

바울은 안디옥을 중심하여 일하고, 후에 로마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디옥 시대는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진 과도기로서,

우리들은 여기서 크게 배울 바가 있다.

 

오늘 그리스도교가 미국에서 일본에 옮겨진다는데도,

옛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지는 때처럼

또한 미국에서 곧 일본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안디옥을 둘도 셋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상당한 연대를 소요하고,

바울 같은 사람도 요하고,

많은 변화를 거쳐 옮겨지는 것이다.

 

만약 오늘의 선교사들이 이것을 알았다면,

현재 같은 결과로는 되지 않았으리라.

 

신자는 모두 한 곳에 모여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산업과 그 소유물을 팔아,

각각 소용에 따라 이것을 나누어주었다.

날마다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있었고,

또 집에서 빵을 떼고,

기쁨과 진심으로서 음식을 함께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게 하셨다’(2:44 이하 일본어역)

 

이는 그리스도교사의 봄날로서

평안, 화락 탄탄한 희망의 대로(大路)를 걸어 나아가는 느낌이 있다.

 

우리들의 생애에도 때로는 그러한 때가 있다.

 

산업과 그 가진 것을 팔아 나누어 주고라는 등,

이것을 읽고 곧 의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과연 이것이 좋은 일일까고,

 

그러나 필경 그러한 의문은 보이지 않는 주를 보지 않고

문제를 경제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는 아니다.

신앙으로서만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살아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배하신다면,

우리들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진 때는 재산의 생각 같은 것은 절로 그치는 것으로서,

그러한 일은 누구에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모두 마음을 하나로 하고 생각을 하나로 하여, 다만 한 사람도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일이 없이, 모두 이것을 함께 가졌다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을 완전한 사회조직으로 보는 것은 결코 좋은 견해는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서 여기에 이른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 없이,

사람의 지식 방법으로서만 사회를 개량하려고 한다.

그 뜻은 퍽 가상할 것이라 해도,

그 길은 전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상향을 미국에 세울 것인가 혹은 멀리 멕시코에 세울 것인가,

이는 가능할 것 같으나 또한 가능하지 못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참된 이상향이란,

하나님께 전부 맡겨 드리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 그 아래 집단(集團)하는 일이다.

 

우리들 지금 여기서 단란회(團欒會)를 개최한대도,

단지 단란이 목적이어서는 단란은 이룩되지 못하고,

또 선생이 주가 되어서는 단란은 이룩되지 못한다.

 

예수께서 우리들의 목표이고,

별달리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단란은 절로 이룩되는 것이다.

 

군대에 군기가 있듯 우리들에게도 또한 표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옳다, 우리들의 목표는 살아계시는 예수이시다.

 

어떻게 하면 단란이 이룩되는 것일까?

침묵이 맺어지는 것일까?

 

이에는 집을 요한다, 음악을 요한다, 문학을 요한다고 사람은 말하나,

이는 무익한 것이다.

 

내 가정에 있어서 주 예수를 알면 단란은 싫어도 이룩되는 것이다.

일가(一家), 주 예수의 이름을 둘 때,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는 집은 반드시 동시에 화락의 집이다.

 

신앙 없이 어떠한 음악을 갖춘대도 참된 단란은 결코 이룩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단란회에 있어서는,

선생이 있기 때문이라든가,

혹은 동지들과 만나기 때문에 모인다든가의 생각을

근본에서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예수께서는의 생각이

1이요, 2이며, 또 제3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빵을 떼고.,

우리의 교회의 만찬식은 아니다.

 

오늘 일정한 식으로 하는 데는 이상한 감이 생기는데,

그것은 본래는 식이 아니라, 마치 악수와도 같은 것으로 상호의 온정의 발로이다.

 

우리들도 또한 배후의 산으로 올라가,

의미에 있어서의 만찬식을 행하여 화합과 균형을 이루는 조(調)를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개요

 

1 예루살렘 시대, 중심적 인물 베드로(1-7)

2 안디옥 시대, 중심적 인물 바나바(8-12)

3 로마 시대, 중심적 인물 바울(13-28)

이상, 독일의 성서학자 바움가르텐 크루시우스의 사도행전 해부에 의한다.

 

(내촌감삼의 성서지 연구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