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의 흠점(欠點)에 대하여

거듭난 삶 2024. 3. 1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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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상(理想)의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 많은 흠점이 있었다.

 

그는 나의 좋은 교사요, 신앙의 형제요, 또 친구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구주는 아니다.

나는 바울을, 도마가 예수를 부른 것 같이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예수를 숭배하고 바울을 경애한다. 바울은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는 아니다.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실 이는 누구랴고 외친

바울은 역시 죄의 사람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

 

바울에게 많은 흠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의하거나, 또 그가 남긴 서간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게 흠점이 있었던 것이, 그에 대한 나의 동경을 일으킨다.

나는 이것에 의해 그가 내 형제임을 안다.

그리고 또 그를 구원한 도가 나를 구원하는 도임을 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자라는 곳(지점)은 도리어 그의 특히 우수한 점(장점)을 보여준다.

속담에 말하는 대로이다.

 

사람의 과실을 보아 그의 인()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의 흠점은 종종 그 미점(美點)을 엿볼 수 있는 길로 된다.

 

바울의 흠점을 아는 것은, 그를 아는 데 있어서의 가장 좋은 길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을 전하는 데 오류가 없는 성서는, 바울에 대해서도 역시 적지 않은 흠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명백한 것의 하나는, 고린도전서 915절에 기록된 그의 말이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복음에 의해 생활함의 권리 있음을 몹시 길게 말한 후에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일(권리)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또 그렇게 해달라고 이것을 써 보내는 것 아니다. 그것은 내 자랑하는 바를 사람에게 헛되이 여김 받기보다는 오히려 죽는 것이 내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몹시 격렬한 말이다.

만약 지금의 전도사가 그러한 말을 했다면, 그는 다소나마 과격 극단으로서 평되었으리라.

 

바울은 여기서 말한 것이다.

 

전도사에게 전도에의해 생활함의 권리가 있다.

곡물을 빻는 소라도, 입에 망을 씌움 없이, 빻으며 곡물을 먹음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 아닌가?

하물며 전도사에 있어서랴! 하지만 나는 이 권리를 쓰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일하여, 생활의 일에 있어서는 독립전도사이다.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하게 하는 일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얻게(받게) 한다. 이는 나의 상급 또는 자랑이다.

그리고 나의 이 자랑을 사람에게 헛되이 여김 받기보다는 죽는 것은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이다라고 한 것이다.

 

짧은 말로서 바꾸어 말한다면,

 

내 독립을 잃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겸손하고 종순해야 할 그리스도 신자의 할 수 있는 말 일는지?

생활의 독립은 그렇듯 귀한 것일지?

 

바울 자신이 바로 앞에, 전도사는 전도사에 의해 생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기 주장한 것을 곧 뒤엎어 버리고, 자기만은 이 권리를 쓰지 않는다 하고,

그 위에 이 권리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커다란 자가당착으로서, 사람의 교사된 자가 결코 입에(말로) 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마치 일본 무사가 수치를 당하기보다는 죽음만 같지 못하다고 함 같은 것으로서,

가령 그 의지(의지)는 가상할 만 하다해도, 그 태도는 결코 칭찬 할 바의 것은 아니다.

실로 자가당착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억지 기질(고집성)을 나타내고 있다 할 수가 있다.

이 말로서 나타난 사도바울은 결코 온량 원만한 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성질)을 엿볼 수 있지 않는가!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타인의 권리는 열심히 이것을 변호했으나, 자신은 이것을 이용하기를 꺼려 주저했던 것이다.

 

권리는 권리이다.

하지만 이것을 쓰는 것도 자유, 쓰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

 

사람에게는 모든 권리 위해 자유의 권리가 있다.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는 것도 역시 귀한 권리이다.

 

그리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독립을 자랑한 다소의 바울은,

그의 전도 생활에 있어서도 의뢰 생활에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의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전도에 종사하도록 부득하게 된 때에,

그는 복종과 함께 기원을 진술하여 말했으리라.

 

주여 나는 전도에 종사합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생활의 일에 대해서는 나에게 독립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전도에 의해 생활하는 권리만은, 이것을 당신께 봉환하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그리하여 그는 종생 자활전도를 실행했다.

 

때로는 물론 신자에게서 사랑의 선물을 받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를 표했으나,

그러나 생활의 일에 있어서는 그는 끝까지 독립 전도사였다.

 

그는 에베소의 신자를 고별하는 때에 말했다.

 

내가 남의 금은 의복을 바란 일(탐한 바) 없다. 내 이 손이, 나와 함께 있는 자의 필요물을 준비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이다’(사도행전 20:33-34)라고.

 

자기의 손을 펴서 이 손이라고 했다.

이 손으로 생활하면서 전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독립의 명예를 손상받기보다는 죽는 편이 오히려 내게 좋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고귀한 바울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 합니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독립을 과중히 여기는 것은 흠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세상에는 의뢰하는 것을 만족해 하는 전도사가 지나치게 많아,

이것 때문에 복음이 무수히 욕 받는 것을 생각하는 때에,

바울의 독립과중이 결코 나쁜 일 아님을 안다.

이것은 흠점이라 해도, 사랑할 만한 좋은 흠점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흠점의 제2,

 

고린도전서 168, 9절에 보여 있다. 이르기를,

 

내가 오순절 까지는 에베소에 있으련다. 그것은 넓고 또는 유효한 문이 열려 내 앞에 있고, 또 대적하는 자도 많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보통 사람이 볼 때 이상한 변명(구실)이다.

 

나는 좀 더 잠시 에베소에 머물련다. 그것은 크게 성공을 가져올 가망 있는 문이 내 앞에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해된다.

 

하지만 대적이 많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고집일 것 밖에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셨다.

 

이 성에서, 사람이 너를 핍박하면, 다른 성으로 피하라’(마태복음 10:23).

 

대적은 이것을 피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대적이 많기 때문에 나는 에베소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종순성을 결여한 것 같이 보여,

지금의 선교사들의 눈으로 볼 때, 아주 온당치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울의 바울인 점(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립을 사랑한 그는 또 어느 정도의 저항을 좋아(사랑)했다.

그는 경우에 의해서는 퇴각하나, 적 앞에 퇴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그에게 로마인의 무사기질이 있었다.

로마의 무사는 말했다.

 

Vivere est militare.(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라고.

 

바울도 어떤 종류의 전투를 (좋아)사랑 했다.

 

대적이 많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많은 전도사가 하듯,

대적이 많기 때문에 떠난다는 것은 아니다.

 

대적이 근절된 후에는 떠난다. 그러나 대적이 있는 동안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용감스러운 구실(변명)이다. 흠점이라면 흠점이다.

 

하지만 독립 과중이 여김과 마찬가지로, 귀히 여겨야 할 사랑스러운 흠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탁받고 로마제국에 전도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한 사람 편이 로마 전제국보다도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이 많은 것을 도리어 기뻐했던 것이다.

대담부적(무적)의 바울이여라고 하고 싶어진다.

 

이 원기가 있었기에 그는 종생 싸우고도 지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늘 보는 바와 같은 연약한 전도사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철군으로서 적에 대하지 않았으나, 대적 앞에서 도망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athletic preacher (운동가인 전도사)였다.

나는 이 흠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제3의 흠점은

 

이것을 사도행전 1612절 이하에서 볼 수가 있다.

그는 실라와 함께 빌립보 성에서 옥사에게 던져져, 많은 견디기 어려운 능욕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구출되고, 마침내 자유의 몸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빌립보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그는 하나의 장난을 했다. 그는 그가 가진 로마 시민권을 써서 시장을 곤경에 빠뜨리고, 그로 하여금 전시를 대표하여 사죄케 하고서, 그런 후에 유유히 떠났다.

 

37절 이하에 이르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로마 사람인데, 죄를 정하지 않고서 공연히 나를 매질하고, 또 옥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 은밀히 우리를 내 보내려 하는가? 옳지 않다. 그들(하리)이 직접 와서 우리를 내 보내도록 하라고.

하리가 이 말을 상관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그가 로마인임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와서 그들에게 여기서 나오기를 원하고, 드디어 그들을 데려 내다가 그 성을 떠나도록 원했다.

두 사람이 옥을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권면한 후 떠나갔다.

 

이것은 복음의 전도사로서 하지 않아도 가한 일이다.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이므로, 빌립보의 관리들의 모욕에 대해 다만 사랑으로서 이에 갚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서 고요히 떠나가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서는 부족을 느꼈다. 그는 좀 관리들을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로마의 시민권을 써 (그는 아마도 몸에 휴대한 증서를 꺼내서 보였으리라) 관리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앞에 무릎 꿇고서 사과케 하고, 그런 후에 활개 치면서 옥문을 나셨던 것이다.

 

짓궂은 사람 바울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전도사로서는 해서 안 될 일을 했다고 많은 사람은 말하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이때 회심(만족)의 웃음을 가득히 띄우고, 동반의 실라를 돌아다보면서 통쾌를 삼호했으리라고.

 

이는 분명히 장난이다. 그러나 해 없는 장난이다. 만약 바울이 곤장으로 맞기 전에 그의 로마의 시민권을 과시했다면, 그의 비 그리스도교적 행위를 비난해도 좋으리라만, 그러나 때릴 만큼은 때리게 하고서, 그런 후에 그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므로, 그 점에 있어서 그가 한 일에 비난 할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해의 장난으로서, 전도사도 때로는 이 정도의 장난을 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전도는 진지한 사업인데, 그러나 때로 해학으로서 얼마쯤 이것을 완화함의 필요가 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휴모어(-)이다.

세상에 귀한 것치고 성실한 사람의 신중한 웃음 같은 것은 없다.

성실이 녹아 (부드러운) 웃음으로 되어 나타난 것, 그것이 휴모어이다.

 

모든 위인에게 휴모어가 있었다.

 

크롬월에게 있었다.

링컨에게 지나칠 정도로 있었다.

죤슨이라든가 칼라일에게 많이 있었다.

 

바울에게 없을 리는 없다. 그리고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빌립보에 있어서 그가 한 것이 그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바울의 인간미를 보고 기뻐한다.

바울은 나의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실라에게 대신하여 그의 전도여행에 동반했으면 한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한 장난보다도 좀 짓궂은 장난을 예루살렘에서 했다.

그것은 그가 신앙으로 인하여 산헤드린에서 재판된 때였다.

일은 사도행전 231-10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그를 재판하는 자의 반이 사두개파의 사람이고 반은 바리새파의 사람임을 알아차리자, 그는 의회에서 외쳐 말했다.

 

여러 형제여, 나는 바리새교인이요, 또 바리새교인의 아들이요.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는 문제로 나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요’(사도행전 23:6)라고.

 

그가 그렇게 말한 때에 그의 심판인 사이에 커다란 쟁론이 일어났다.

그것은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고, 바리새인은 이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판은 그치고, 바울은 로마 군대에 인도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바울은 잘 암기웅변 했달 수가 있다.

반대자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기의 안전을 꾀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 했다고 하면 아무 탓할 바는 없다.

하지만 복음의 선전자(전도인)의 행위로서는 비난할 바 없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의회를 속인 점 없지 않다.

 

그가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는데, 그것은 문자대로 사실은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지만 지금은 크리스천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랄 수가 있다.

어쨌거나, 이 경우에 있어서 바울은 사도 답지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다.

 

엄격히 말하면, 바울은 여기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적을 속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는 복음의 전달자라 하여 사람에게 속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죄인으로서 정죄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의 내홍(내분)을 이용하여 재액을 면할 것은 나쁜 일로서 볼 수는 없다.

그는 이것 때문에 별로 심판인에게 해를 가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상시 거듭하던 쟁론을 이용하여 한 때의 난을 피했던 것이다.

 

적기에 임기응변한 것이다. 그가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조용히 대처한 그의 조치(선처)에 경복치 않을 수 없다. 이로서 본대도, 바울은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호인은 아니었다.

 

일이 지난 후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서로 말했으리라.

 

저 바울은 아주 다루기 어려운 놈이다. 우리의 분쟁을 이용하여 우리를 쳤다. 우리들은 저 한 사람에게 본때 있게 한 대 맞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인의 병영에 보내진 후, 독방에서 혼자 쾌소(快笑)에 잠겼으리라.

 

원래, 전도는 의무인 동시에 또 커다란 쾌락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 쾌락이 동반치 않는 일은 영속치 못한다.

 

바울이 일생을 통해 전도에 종사하여 지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는,

확실히 그가 이에 커다란 쾌락을 느꼈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쾌락 있는 곳에 웃음은 절로 금치 못한다.

 

바울은 천연을 사랑하고 미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방면에 있어서 그에게 쾌락은 없었으나, 인사에 있어서는 그에게 충분한 요해(이해)가 있었고, 따라서 그 관찰에 커다란 취미를 가졌다.

 

그는 인간의 기소적(譏笑的) 방면을 보아 넘기지(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오인은 마틴루터의 일화집을 가지고 있듯 바울의 그것을 가지지 못한다.

 

만약 누가가 후세를 위해 바울의 일화집을 남겨 주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으랴!

 

그러나 오인이 오늘 가지고 있는 기록 중에 조금이라도 그의 휴모어적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커다란 감사이다.

 

이상은 바울의 흠점이라 해도 작고 경한 흠점이다.

그렇지만 이 밖에 달리 커다란 중한 흠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적을 욕한 말이다.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라내 사랑하는 자여, 원수를 갚지 말라. 물러가서 주의 노하심을 기다리라고 스스로 가르친 바울 자신이,

 

반대자에 대하여 퍽이나 격한 말을 했다.

만약 일본의 그리스도계에 있어서 나의 반대자에 대하여, 바울이 한 것 같은 말을 내가 했더라면, 사람들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미국선교사 같은 이는 반드시 나를 책잡든지 비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말로서 했으리라.

하지만 사실은 덮어둘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저명한 것을 여기서 싣는다.

 

 

빌립보 32절에 있어서, 그는 빌립보에 있는 신자에게 주의를 촉구하여 말했다.

 

너희는 개를 삼가라. 악을 행하는 자를 삼가라. 할례를 행하는 자를 삼가라.

 

이것은 대단한 욕이다. 할례를 행하는 자란, 모세의 율법의 실행을 필요로 인정하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바울의 교의상의 반대자이다.

 

그런 사람을 불러 악을 행하는 자라하고, 다시 라 한다.

이것은 무례한 일이며, 조포, 야비한 일이다.

어떻게 본대도 그리스도적 신자가 한 말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서 만족치 않고, 다시 더 세찬 말을 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512절이다.

 

(갈라디아서 5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그 의미는 명백하여, 그리스어로서 성서를 읽는 자는 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너무나도 추악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이것을 덮어두려 하고, 이것을 외어로 역하는데 있어서는 전연 원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옛 일본역에 의하면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가, 스스로 너희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고 있어서, 그 안에 아무런 꺼릴 것 없다 해도, 그것이 충실한 번역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개정역에 있어서는 조금 원문의 뜻을 보이려 애써, 다음과 같이 역했다.

 

원하옵기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가, 스스로를 불구로 되게 하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바울은 그런 약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할례를 너희께 강요하여, 너희의 신앙을 어지럽히는 자가, 더 나아가 양(양물)을 그 근부터 끊어 버리기를이라고.

 

즉 할례란 양물(남자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인데, 그것이 구령에 필요하다면, 더 나아가 양의 근(시근)부터 끊기를 권한다는 것이다. 할례를 조소한 말로 이것보다도 격렬한 것은 없다.

 

바울은 이 과격한 말을 발함에 있어서 신명기 231절을 심중에 가졌으리라.

 

(신명기 231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인 자가, 그러한 과격한, 그것도 야비한 말을 발하여 적을 욕(비나)해 좋을까?

 

이것은 어떻게 본대도 바울의 흠점으로서, 이 일에 대하여 그를 변호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흠점은 미점을 보여주는 일조인 것으로서, 이 흠점에 의해 바울의 심중 깊은 데를 엿볼 수가 있다.

 

즉 그가 열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잘 사랑함과 동시에 잘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박사 죤슨은 잘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의 클럽()의 일원 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데, 실로 잘 증오할 수 없는 자는 잘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실한 사람은 중도반도일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격려되어 사랑의 구역을 넓히고 또 깊이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동시에 또 그 사람을 유린하는 자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노를 품기에 이른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바울에게 예언자 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는 태워버리는 불같은 예언자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천성은 쉽게 없어지는 것 아니다.

마치 일본 무사가 그리스도 신자로 되어 종생 무사기질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퍽 단호한 말을 썼다. 바울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쓴 것 같은 말의 모범을 보았다.

 

예레미야 224절 같은 것, 그 하나이다.

 

(예레미야 224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완만한 일본역으로도 얼마쯤 그 원의를 엿볼 수가 있다.

 

에스겔서 1626절 같은 것,

 

(에스겔서 1626 하체가 큰 네 이웃 나라 애굽 사람과도 음행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진노를 샀도다)

 

도저히 원어 그대로를 역출하여 이것을 오늘의 신사 숙녀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열성으로 불타는 예언자들은 그의 의분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말의 선택에 유의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예의도 무례도 도외시하고, 백성의 불의불신을 책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얼마나 격렬한 말을 썼지만도 그래도 부족을 느꼈던 것이다.

 

예의의 사람 반드시 선인이 아니다.

많은 악인이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바울의 무례같은 것, 종종 그의 중심의 열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타 세어보면 바울의 흠점은 아직 다른 것도 있다. 고린도후서 같은 것, 결코 온후 독실한 군자의 심정의 노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 있으므로 우리들은 바울의 사람됨(인격)을 잘 해득할 수가 있다.

고린도후서는 그것 때문에 특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은 흠점 많은 사람이었다고 단언하여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흠점 있기 때문에 그에게 보인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분명히 우리에게 보이고,

우리들은 이에 격려되어, 우리의 흠점에 눈을 쏟지 않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러러 보고,

우리들의 구원의 완성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흠점 때문에 실족하는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완전과 그 능력을 모르는 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 주이시고, 바울은 구원된 자이다.

 

구원된 자가 완전할 리는 없다. 스스로 칭하여 죄인의 괴수라고 한 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여 급히 완전해질 리는 없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그의 생애의 나중에 임박하여, 완전에 달하기에는 아직 먼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12절에 있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이들 바라는 것을 이미 얻었다고 함이 아니다. 또 이미 완전해졌다고 하는 것 아니다. 이를 취하려고, 나는 다만 이것을 추구한다.

 

완전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 바울도 우리도 다를 바는 없다.

 

주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스승은 한 사람, 곧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마태복음 23:8)라고.

 

바울은 우리들의 스승이 아니라, 우리들의 형제이다.

훌륭한 형제임에 틀림없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자녀이다.

구원된 죄인으로서, 죄를 모르는 성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리운 바가 있다.

나는 나의 최선최대의 장형으로서 다소의 방루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웃고 또 노했다.

그에게 예언자의 조야한데가 있었다. 동시에 또 부인 같은 섬미한데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접근하여, 그는 아주 친근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이상으로 사도행전 연구전과정을 마칩니다.